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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오빠/잡문창고

가치있는 비판에 대하여 2

지난 토론의 후기를 읽었습니다. 댓글로 다 달지 못해 이어지는 포스트를 씁니다.

원글: 이응부자의 가치 있는 비판에 관하여 

 

나 역시 동의하고 지향하고 있지만 잘 안 되는 것이 문제인데,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을 조금 더 보태면 다음과 같다.

 

1.

누군가의 주장을 되도록 자비롭게 이해하자는 것이 무비판적인 수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비판적 수용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첫째, 전제가 사실과 부합하는지를 따지고

둘째, 근거가 주장을 잘 지지하는지를 따지고

셋째, 자신의 주장들 사이에 내적 모순이 없는지를 따진다.

모든 비판이 전제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가장 쉽고 간편한 것이 전제를 공격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제에 대한 검토의 초점은 사실과 부합여부에 맞춰져야지 자신의 입장과의 부합여부에 달려 있어서는 안 된다. 후자는 종교재판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내적 정합성 문제는 내가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천성이 삐뚠지, 일단 까고 보는 탓에 그러지 않으려고 내 스스로 정한 선이 있다. "그래 일단 그렇다치고" 라는 말로 전제와 결론을 받고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아직 충분히 자비롭지 못하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래서 나는 "좋아 당신이 A=B라고 말하는 거 받아들이겠어. 그럼 B에 C가 포함되는거지. 그럼 A에도 C가 포함되어야 하는거지. 그런데 왜 여기서는 C를 배제하는거야." 라고 반박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그야말로 내가 사랑하는 단어 "내적 모순"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내가 가장 원치 않는 대답은 "경우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이다. 그렇다면 "A=B라는 주장도 경우에 따라 그럴 수 있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내가 "경우에 따라 그럴 수 있다." 는 것을 비난조로 사용하는 까닭을 설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나름대로 연구자로서 연구의 목적에 대해 나름의 고민을 해오고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연구자의 입장에서 현실의 설명 혹은 변화 혹은 각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 이론은 개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과학이든 역사학이든 철학이든 신학이든 대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연구를 하고 연구물을 생산하지 않는가? 그 이해와 설명은 기본적으로 보편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일반화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론 연구는 사례들의 일반화과정이다.

물론 어떤 이론도 모든 사례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론이 이론인 이상 모든 개별적인 사례들을 하나하나 설명하지 못해도 개별적인 사례들의 기저에 있는 중요한 원인이나 과정, 변수 들은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말과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말은 정말 맞다. 모든 경우에 다 들어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건 '이론'이 될 수 없다. 예외를 산정하더라도 일반화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일반화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이라면 이 단락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내 입장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반화의 부정'은 '이론화의 부정'이며, '설명과 이해의 부정'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도 일반화될 수 없다는 주장은 어떻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길 바라는지 모르겠다. )

이론의 문제를 지적하는 한 가지 방법 또한 반례의 제시이다. 어떤 반례들은 예외로 처리되어야 할 것이다. 반례가 너무 많다면 그 이론은 일반화에 실패한 것이다. 물론 작은 반례로 전체 문제를 호도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이번에 내가 제시한 반례 역시 그랬을지 모르겠다. 내 딴에는 내적 모순을 지적하는 핵심적 반례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의 생각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