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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부자/ㅇㅇ

가치 있는 비판에 관하여

(오늘 이야기하면서 들었던 생각을 제가 잊어버리기 전에 적는 글임.)





가치 있는 비판을 지향한다고 말하면 가치의 위계를 나누는 거 같아 불편하다. 모든 비판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단지 여기서 내가 말하는 가치 있는 비판은 내가 선호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비판을 의미한다. 특히 책을 읽을 때 말이다. 내가 선호하는 비판은 생산적인 비판이다. 무엇을 단지 내놓는다는 생산성이 아니라 긍정적인 생산성을 뜻한다. 책을 읽고 나서 이 책은 쓰레기네. 왜 사람들이 읽는지 모르겠다.”로 끝나면 너무 허무하다. 설령 이 책이 쓰레기인 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허무하다. 읽을 필요가 없었다는 결과는 내 선택을 반성하게 할 뿐이다. 그 외에 무엇이 있는가? 책에 관한 안목을 높이는 것일까? 선입견을 높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책이 가치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이미 나의 선호와 가치 추구의 관점이 접목되지 않을 리 없다. 그러한 책에 관해서는 긍정적인 비판을 하자는 것이 내 생각이고 선언이다.


책을 가장 쉽게 비판하는 방법은 그 사람의 전제를 허수아비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오류이니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또 다른 방법은 그 사람의 전제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의 전제는 사실인가? 확실한가? 이러한 물음은 분명 가치 있다. 정의에 대한 명료성은 적확한 논의의 초석임을 그 옛날 소크라테스부터 주장하던 바이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사실성과 확실성 자체가 무엇인지에 관한 돌이킬 수 없는물음에 빠지게 된다. 물론 대부분은 거기까지는 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인간이) 어느 정도 합의한 것을 전제하고 말하자고 할 것이다. 말하자면 어느 선에서는 멈춰서 모호성을 받아들이는 셈인데, 그 모호성을 더 앞으로 가져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가령 그 사람의 전제를 받아들이는 데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자비의 원칙을 지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제에 대한 반론은 대단히 치명적이다. 아무리 매력적인 논의라도 근본을 흔들기 때문에 단숨에 매력적인 논의를 쓰레기로 만들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완벽한 전제가 어디에 있는가? 진부한 예이지만, 이 글을 쓰는 내가 통속의 뇌임을 진부하게도부정할 수조차 없다. 완벽한 전제를 기대하는 것은, 예외적 사례가 없는 이론을 바라는 것은, 포퍼의 말마따나 이론이 아니라 종교를 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최대한으로 주장한 정의를 받아들인다고 치고그 정합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연히 누구나 이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내가 의도하는 받아들인다고 치는 것은 특수한 예외적 사례를 지양하는 것이며, 개념의 엄밀성 요구를 지양하는 것이자, 주장이 지닌 긍정적 가치를 온전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모든 반론은 전제로 향한다. 그러므로 전제를 건들지 말라는 것은 반론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된다. 당연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비판의 긍정적 생산성은 말하자면 대전제보다는 소전제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주장의 정합성 비판은 가상적 사례보다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례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